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고트 왕국 (문단 편집) ==== [[테오도리크 2세]]와 [[에우리크]] ==== '''[[테오도리크 2세]]'''는 왕위에 오른 뒤 [[서로마 제국]]과 화해했고, 454년 프레데리크를 시켜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에서 일어난 바가우다이(농민) 반란을 진압했다. 455년 아에티우스를 살해한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아에티우스의 부하들에게 피살된 뒤 새 황제에 오른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는 그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아비투스를 툴루즈로 파견했다. 그는 스승이자 친구인 그를 정성껏 대접하며 로마와의 동맹을 유지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얼마 후 [[가이세리크]]가 이끄는 [[반달족]]이 로마로 쳐들어왔고, 페트로니우스 황제가 도망치다가 시민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아비투스는 속주민들과 갈리아 주둔 로마군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칭했고, 그는 아비투스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아비투스는 자신을 도와준 그에게 보답하는 의미로 서고트 왕국이 세력을 히스파니아로 확장하는 걸 용인했다. 이렇게 아비투스의 승인을 얻어낸 뒤, 456년 히스파니아로 진격해 캄포스 파라무스 전투에서 [[레치아르]] 왕이 이끄는 수에비군을 격멸하고 브라가를 [[수에비 왕국]]으로부터 탈취한 뒤 메리다를 함락시켰으며, 457년에 아스토르가와 팔렌시아를 약탈했다. 수에비 왕국은 서고트 왕국의 맹공으로 수도 브라가를 빼앗겨 지리멸렬한 상태로 전락했다. 그 후 테오도리크 2세는 아키텐으로 귀환하면서 이베리아 반도 서쪽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수네리크 공작과 키릴라에게 해당 지역의 방위를 일임했다 그런데 456년 10월, [[플라비우스 리키메르]]가 반란을 일으켜 아비투스를 폐위했다. 그 후 리키메르는 1년 가까이 뜸을 들이다가 로마군이 이탈리아에 침공해온 알레마니족을 격퇴하고 돌아오던 [[마요리아누스]]를 방패에 올려서 황제로 추대하자 457년 4월 1일에 마요리아누스를 정식으로 로마 황제로 옹립했다. 테오도리크 2세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마요리아누스를 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적대했다. 이에 마요리아누스는 서고트 왕국과 맞서 싸우기로 하고 458년 말에 군대를 이끌고 남부 갈리아로 진군했다. 이후 마요리아누스의 군대는 서고트 왕국의 군대를 격파했고 남부 갈리아를 로마 제국에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결국 그는 마요리아누스를 황제로 용인하고 마요리아누스가 확보한 영토를 인정해야 했다. 459년, 마요리아누스는 여세를 몰아 히스파니아 탈환에 착수했다. 그는 네포티아누스와 수니에리치 장군을 파견해 히스파니아에 거주하던 수에비족을 격파하게했다. 두 장군은 루쿠스 아우구스티에서 수에비족을 격파하고 스칼라비스를 점령했다. 그 동안 마요리아누스는 사라고사를 거쳐 히스파니아 깊숙히 진군해 카르타기니엔시스까지 나아갔다. 이리하여 로마는 히스파니아에서의 종주권을 되찾았고 서고트 왕국은 멸망 직전까지 몰렸다. 그러던 461년, [[반달 왕국]]으로부터 아프리카 속주를 되찾기 위해 카르타고노바에 함대를 집결시켰던 마요리아누스는 반달 왕국의 군주 [[가이세리크]]의 급습으로 다수의 함대가 파괴되는 참패를 당했다. 이후 이탈리아로 귀환하다가 리키메르에 의해 긴급 체포되어 폐위된 뒤 며칠간 고문당한 끝에 살해되었다. 마요리아누스가 비참하게 죽자, 그에 의해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던 네포티아누스는 리키메르에 의해 새 황제로 선임된 [[리비우스 세베루스]]에게 복종하길 거부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었다. 하지만 얼마 후 테오도리크 2세의 침공으로 축출되었고, 로마 관리 아르보리우스가 새 총독으로 임명되어 서고트 왕국에 충성을 맹세했다. 한편 역시 마요리아누스에 의해 갈리아 총독으로 임명된 [[아에기디우스]]도 리비우스 세베루스에게 복종하는 걸 거부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꾸렸다. 리비우스 세베루스는 그를 제압하기 위해 자신의 추종자인 아그리피누스를 갈리아로 파견하여 아에기디우스의 권력을 대체하게 했다. 아그리피누스는 테오도리크 2세에게 접근해 자신을 도와준다면 나르본 시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안 그래도 나르보 시를 공략하고 싶었던 그는 흔쾌히 받아들이고 프레데리크를 시켜 아에기디우스를 치게 했다. 그러나 아에기디우스는 오를레앙 전투에서 고트족을 격파했고, 프레데리크는 전사했다. 아에기디우스는 가이세리크와 연합하여 이탈리아와 서고트 왕국에 대한 동시 공격을 계획했다. 하지만 464년 가을 아에기디우스가 역병으로 사망하면서 서고트 왕국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테오도리크 2세는 적들이 아에기디우스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혼란한 틈을 타 루아르 중류 일대를 공략했다. 466년, 그는 툴루즈에서 살해당했다. <사라고사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부하들에게 칼에 찔러 죽었다고 한다. 세비야의 이시도로스는 동생 에우리크가 암살을 사주했다고 주장했다. 요르다네스는 그는 자연사했지만 에우리크가 지나치게 서둘러서 왕이 되었기에 의심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기술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에우리크]]'''는 466년과 467년에 [[수에비 왕국]], [[반달 왕국]], [[동로마 제국]]에 사절을 보내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들로부터 인정받았다. 다만 467년 동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과 연합하여 반달 왕국을 공격했을 때, 그가 보낸 사절단은 군대를 따라가다가 도중에 귀국했다. 로마와 반달 왕국과의 분쟁에 섣불리 개입하고 싶지 않은 그의 의중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467년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안테미우스]]는 서고트 왕국의 국력이 신장되는 것에 위협을 느끼고 [[부르군트족]], 브류타뉴인, 갈리아 총독 아에기디우스, 라인 강 연안 지대의 [[프랑크족]]과 연합하여 반 고트 전선을 형성하려 했다. 여기에 히스파니아의 친 로마 세력과 수에비 왕국도 끌여들일 계획이었다. 하지만 에우리크는 반 고트 동맹이 결성되기 전에 행동에 나섰다. 468년, 그는 루시타니아를 장악하고 있는 수에비 왕국으로 쳐들어가 대규모의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수에비 왕 [[레미스문트]]는 고트족에 대항하기 위해 안테미우스 황제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사절을 보냈다. 얼마 후, 안테미우스는 갈리아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을 맡고 있던 아르반두스가 자신을 상대로 반역을 꾀했다는 고변을 접했다. 이에 따르면, 아르반두스는 서고트 왕 에우리크에게 자신이 제위를 차지할 수 있게 도와준다면 갈리아를 루아르 강을 경계로 부르군트족과 양분해주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했지만, 안테미우스는 즉시 아르반두스를 체포해 처형했다. 이 소동으로 갈리아 방면 로마군이 일시적으로 행동 불능 상태가 된 사이, 브르타뉴의 왕 라이오타메가 1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부르주 인근으로 진군해 로마군과 합세하려 했다. 에우리크는 즉시 이들을 공격해 데올(현재 샤토루 교외)에서 격파했고, 브르타뉴 잔당들은 부르군트족의 영역으로 도피했다. 에우리크는 이제 로마가 장악하고 있는 남부 갈리아로 방향을 돌렸다. 470년 론 강을 건넌 그의 군대는 지중해 연안까지 진군했다. 당시 안테미우스는 서로마 제국의 권신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와 분쟁을 벌이고 있었지만, 서고트 왕국이 남부 갈리아를 전부 차지하는 걸 내버려뒀다간 서로마 제국은 끝장이라고 여기고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이 군대는 471년 초여름 에우리크에게 섬멸되었고, 안테미우스의 아들을 포함한 모든 지휘관이 전사했다. 이리하여 서고트군은 리옹, 아를, 아비뇽, 오를레앙, 발랑스, 생폴트루아사토까지 접수했다. 부르군트족이 반격에 나서 발랑스 남쪽의 론 강 좌안 지대에서 고트군을 격퇴했지만, 고트군은 후퇴하면서 초토화 전술을 사용했고, 이 지역에 살던 로마인들은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다. 이후 도시 주교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와 [[아비투스(로마)|아비투스]]의 아들인 에키디우스가 버틴 클레르몽을 제외한 아키텐 속주 대부분이 서고트 왕국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472~473년, 에우리크가 이끄는 서고트군은 2개 부대로 나뉜 채 히스파니아 남부로 진격했다. 한 부대는 팜플로나와 사라고사를 점령했고, 다른 한 부대는 지중해 해변 도시와 '먼 히스파니아 속주'의 수도인 타라고나를 점령했다. 에브로 계곡의 로마 귀족들이 연합군을 편성해 맞섰지만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리하여 서로마 제국은 히스파니아를 영영 잃어버렸고, 서고트 왕국은 히스파니아 북서쪽의 수에비 왕국과 북쪽의 바스크 지역을 제외한 히스파니아 전역을 차지했다. 히스파니아 정벌을 달성한 뒤, 그는 갈리아로 눈길을 돌렸다. 473년 마르세유를 함락했고, 자신의 지배에 복종하지 않은 로마인들을 탄압했다. 그는 독실한 [[아리우스파]] 신자로, [[니케아 공의회]]가 정한 [[삼위일체론]]을 신봉하는 자들을 철저하게 박해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오에 따르면, 그는 사제들을 감옥에 던져넣고 주교들을 추방하거나 칼로 찔러 죽였으며, 교회 입구에 가시를 심으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또한 에우리크가 가혹한 탄압을 가하는 과정에서 보르도, 로데스, 페리괴, 리모주, 자볼스, 코밍게스, 오즈, 바자스, 그리고 오슈 시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475년, 로마 제국의 새 황제 [[율리우스 네포스]]로부터 서고트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으라는 지시를 받은 파비아 주교 에피파니우스가 툴루즈에 찾아왔다. 에피파니우스는 서고트 측이 로마가 갈리아의 지배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받아들이고 로마의 봉신을 자처한다면, 황제는 그들이 지금까지 확보한 영역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받아들일 생각이 있다고 밝혔다. 이에 에우리크는 자신은 황제를 '주인'이 아닌 '친구'라고 부를 것이라고 답했다. 에피파니우스는 이에 동의했고, 아키텐 속주에서 유일하게 서고트 왕국의 공세로부터 버텼던 클레르몽이 고트족에게 넘겨졌다. 이제 론 강 동쪽과 뒤랑스 강 남쪽 지역만이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 남았다. 이리하여 남부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대부분의 지배권을 확보한 뒤, 그는 더 이상 전쟁을 벌이지 않고 내치에 전념했다. 그는 고트족 내부에서 전해지는 관습법들을 엮은 성문법전을 반포했으며, 나르본의 레오 등 저명한 로마인들을 측근으로 기용했다. 또한 정교(카톨릭)를 탄압하는 한편 아리우스파의 교리를 뿌리내리기 위해 점령지 곳곳에 교회를 신설했다. 한편 주변 세력과 사신을 주고받았는데,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에 따르면 [[사산 왕조]]의 사절도 이 시기에 툴루즈 궁정에 찾아왔다고 한다. [[파일:최전성기의 서고트 왕국.jpg]] 서고트 왕국은 에우리크의 치세 때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히스파니아 북서부의 [[수에비 왕국]]은 지리멸렬했고, [[프랑크 왕국]]은 라인강 연안에 국한되었으며, [[부르군트 왕국]]과 [[오도아케르]]의 이탈리아 왕국 역시 서고트 왕국에 한 수 접어야 했다. 그러나 484년 에우리크가 자연사한 후 프랑크 왕국에서 [[클로비스 1세]]라는 걸출한 인물이 등장하면서, 강대했던 서고트 왕국은 위기에 직면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